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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ê Đức Thọ, Từ Liêm, Hà Nội, 베트남

 

베트남의 거리는 전에도 말했듯 나라의 위인들의 거리이다.

 

그중 내가 자주 가는 거리중 하나인 레득터/Lê Đức Thọ 크라운 호텔을 자주가야하는(호텔 투숙은 무리!! 비싸..ㅋㅋ) 나로써는 이거리가 낮설지 않다.

 

 

 

 

Lê Đức Thọ

 

정치부 전위원, 중앙당 집행 위원회  고문이었던 레득터는 호치민 출신이며 베트남 혁명의 중요인사의 한명으로 베트남 정부의 중요 간부를 지낸 사람이다.

 

이 외교간의 이름을 딴 레듯터 거리는 길이 약 3.5 킬로메터로 완공된지는 10년정도 되었고 하노이시 남뜨리엠구에 속한다. 거리는 동북쪽으로 호뚱 머우 거리 남쪽에 랑 화락 고속도로와 접하며 거리는 미딩 종합운동장 국립 스포츠센터 빅시 프라자 등이 자리하고 있는 거리이다.

 

레득터는( Lê Đức Thọ ) 외교적 측면에서 지대한 공헌을 한 근대역사의 인물중에 한사람이라 한다.

베트남의 미국과 전쟁은 근대 베트남 역사에 아주 큰 비중을 차지한다. 베트남의 주권을 온전히 지켯을 뿐아니라 월맹은 월남을 통일또는 병합 시켰고 근데 세계 대전행중에도 매우 큰 의미를 주고있지 않을까 싶다.

 

레득터는 ( Lê Đức Thọ ) 판딘카이 라는 이름으로 1911년 10월 10일 에 애국심과 교육열이 강한 남딘 성 미록현 디익레 면에 속한 유교 가정에서 태어난다.

프랑스 정권 당시 14였던 그는 판쭈징 ( Phan Chu Trinh ) 이라는 우국지사를 석방하라는 항의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가하였다. 그황동을 통하여 그는 베트남 혁명 청년단원과 만날수 있었고 애국심을 키우고 혁명 정신을 고취 할수 있었다.

 

17살이 되었을때 베트남 혁명 청년단에 가입 혁명 조직에서 활동 식민 공건 정권의 압박 착취에 열성적으로 저항한 인물이다.

 

1929년 10월 레득터는 동즈엉 광산당에 가입하였고 그는 청소년 공작 책임 활동을 담당한 서기가 되었다.

 

1930년 11월에 그는 프랑스 식민 정권에게 붙잡혀 징역을 선고 받고 꼰 다오 감옥으로 유배. (그 곳은 생지옥과 다름 없었다 전해짐) 그곳에서도 전폭적 신임을 받아 감옥의 서기를 맡았다.

 

1936년 부터 1939년 가지 옥살이를 한 레득터 ( Lê Đức Thọ ) 는 당 조직 신문에 관한 을을 하면서 남딘 성에 당의 비밀조직을 설립하는데 관여한다.

 

그 후로도 다시 투옥되어 1939년 부터1944년까지 5년동안 하노이/ 선라/ 화빈 감옥에 유배 되었고 1944년에 다시 출감하여 당의 지시에 따라 안전지구에 가서 간부훈련 및 간부단 설립을 책임 지게 되었다.

 

1945년  8월 던짜어 에서 열린 전당 대회에서 레득터는 중앙당 상임위원회의 위원으로 임명 레득터는 당의 다른지도자를과 협력하여 중앙당을 설립하고 당원을 배치하고 초기 혁명 정권을 세웠다.

명명 성과를 지키고 발헌하여  프랑스 식민 대항 전쟁을 준비하는데 엄청난 기여를 하였다.

 

1948년에 레득터 ( Lê Đức Thọ ) 는 중앙당을 대신하여 남부로 가서 활동하였는데 , 그는 당의 청치 철학을 가지고 혁명을 위한 실제적인 투쟁 경험이 있는 간부들과 훈련시키는 수업의 중요한 스승이 되었다.

 

1955년 북부 중앙통일부 부장.

1968년 총공세 이부에는 정치부의 의해 남부지역 부서기의 직책 임명

 

1968년 5월 그는 파리  회의에 참가하는 대표의 고문으로 활약

 

1980년 특수 정치학교의 상임서기 교장 제직

 

생애를 항상 열정적이과 확고한 공산주의자로 살아간 그의 공적을 기리는 거리이다.

 

 

 

앞서 포스트에 11세기 리왕조의 최고 장군 리 트엉 끼엣에 대한 이야기를 했고 오늘은 

베트남 최고의 장군 쩐 흥 다오 장군/ Trần Hưng Đạo에 대하여 잠깐 포스팅을 할까 한다.


내가 이들 베트남에서 위인들을 알아가는것은 고작해야 인터넷 발취나 한인잡지들이지만 다시 혹쉬 다른이들이 지금 이베트남에 또 하노이에 여행와 거리를 거닐면서 그길에 이름의 의미를 조금이나마 알고간다면 짝퉁이 운동화나 매연에 찌든 오토바이 때거지들을 보는것보단 이득이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물론 이러면서 나도 베트남을 공부하고..ㅋㅋ


난세에 영웅이 태어난다.. 화려했던 리 왕조는 215년의 역사를 뒤로하고 9대의 걸친 리왕조가 쩐왕조에 무너진다.

여느 왕조들이 그러하듯 있는자들의 사치(왕족)그리고 부패가 날로 심해지고 민심이 악화되고 왕위싸움으로 

이어진다. 이때쯤 우리나라로 도망친 왕족의 한둘이 우리나라에 정착해 대를 이어가는데 이들이 정선이씨 화산이씨라 한다.


9대 헤종? 암튼 쩐투도( 진수도)라는 권문세족이 외척이되면서 강력한 실권을 휘두르고 반란을 평정 헤종을 페위(1224년) 그의 딸을(소황제) 자신의 조카와 혼인(쩐태종) 황희를 선양(1225년) 하는 방식으로 쩐의 시대를 연다.


(리씨일족 몰살!!)


뭔가 왕족들의 이야기는 왜지 비슷 요즘 즐겨보던 (이방원이나 다를바 없음) 왕족들의 이야기는 지아버지도 죽이고 지동생도 죽이고 스승도 죽이고....패륜아들이 대부분 왕이 되는 역사!! 


과정이야 어떻든 성공하면 장땡이라는 옛이나 지금이나 다를바 없는 씁슬한 현실을 역사를 보면서 다시한번 ...ㅜㅜ


이런 도덕적 페륜에도 여런 반란을 진압 사회 안정을 찾고 정치 제도 군사조직 개편 그리고 강력한 원나라의 침입을 막는 위엄을 자랑하는 왕조이다.



그리고 그 위엄속에 쩐흥따오 장군이 자리잡있다.


쩐흥따오 한마디 꺼내려고 몇줄을 이야기 한거야...ㅋㅋ 


쩐왕조가 안남의 주인이 된시기 강력한 몽골제국의 침공을 받는다.


1차 1257년 수군과 거란 여진족 혼성 3만 군사로 수도인 탕롱을 점령(지금의 하노이)하엿으나 기후에 적응을 못한건지 전영병으로 철수 이틈에 재 쩐왕조 재정비.

2차 1284년 원의 세조 쿠빌라이 칸( 세상의 어쩌구인가 지실혹 거진인가 암튼 티비에서 쿠빌라이 칸의 어머니가 신라의 공주일수도 있다는 그런 야기기를 본적이 있다. 믿거나 말거나 한이야기)이 참파 운남 광동 에서 삼로로 공격을 하고 쩐을 명망 직전까지 몰아갔지만 전연병과 쩐흥따오의 계속되는 항전으로 5만의 포로를 만들며 대패 

1285년 안남 왕조는 대월로 자주성의 강조 하였다.

3차 쿠빌라이칸의 의지로 일본원정을 중지 하고 대월을 침공하였으나 바익당강 전투에서 전흥따오가 원나라의 병량을 격하함으로 이또한 침공을 막아내었다.

4차 근성의 쿠빌라이칸이 끝없는 시도는 계속되었으나 그의 사망으로 4차는 이루어 지지않음


1287년 수륙양군의 30만 대군을 이끌고 원군이 침량할때 밧당강에서 강바닦에 용치를 박고 만조때유인 간조때 원의 수군을 대파하였다는 이야기는 전흥따오를 제1의 민족 대장군으로 현대까지 칭송하게 만든 계기가 되었다.

징기스칸의 후애 원나라에 대항하여 굴복하지않은 당대 유일의 국가를 만들게 하였으니 베트남 제1의 장군이라 베트남 해군으 아버지로 기리는데 손색이 없다 한겠다.


쩐흥다오 장군을 기리는 사원은 여러곳에 자리잡고 있으나 내가 아는곳은 호안끼엠의 응옥사.( 구 사이공 현 호치민에 도 있음) 학술의 신과 함께 모시는것으로 알수 있다.


전흥따오 거리는 리트엉끼엣 스트리트 한블럭 아래 수평하게 가로질러 자리 잡고 있다. 빈컴 프라자? 빈컴시티 암튼 빈컴을 가려고 늘 지나던 거리의 이야기를 이제서야 알게되었다.다음에 갈때는 더욱 그길이 새롭게 여겨질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