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역사/ 리 트엉 끼엣 / 리트엉끼엣 거리/ Lý Thường Kiệt, Hanoi, Vietnam
리트엉 끼엣
(베트남 역대 위대한 장군 4명중 첫번째!)
나라의 위인을 딴 거리...
훌륭한 장군의 이름을 가진 거리 ..
천년전 중국 송나라에 맞서 싸워 베트남 민족의 역사를 만든 그싸움 그리고 민족의 영웅을 기리는 거리!!
리트엉 끼엣 거리는 길이가 약3.5 킬로매터 정도이고 서북쪽에 레쭈언 거리와 교차하고 동남쪽 레 타이똥 , 판 보이 쩌우 꽝쭝 바찌에우 항바이 응오꾸엔 판쭈찡 거리와 교차한다.
리 트엉 끼엣의 본명은 (1019~1105) 응오뚜언 으로 응오안 응우 장군의 아들이다. 리타이또 왕이 제위에 오를 때 응오안 응으는 하급 무관이었고 탕롱 (베트남의 옛수도이며 지금의 하노이) 으로 이사하고 이곳에서 리트엉 끼엣이 태어났다.
리트엉 끼엣이 13살이 되었을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18살이 될무렵 어머니가 돌아가셨는데 고모부인 따뜩의 격려와 도움을 받아 동생인 트엉 히엔과 같이 나라에 도움이 되고 집안에 자랑이 된수 있도록 무술과 학문을 공부하고 의지를 키웠다.
"푸엄"이라는 아버지의 직위를 물려받을수 있는 풍습에따라 아버지가 죽은후 끼마 히에우 위 기경중 작은 관직의 직위를 받았다.
위인들이 늘 그러하듯 어려서부터 총명(인재는 타고나야한다는 건가..ㅠㅠ/똑같이 연습해도 메쉬도 한명 . 호날두도 한명. 운명은 정했졌다는것가...잠깐.뻘소리..ㅡ,.ㅡ)그는 강한 정신력과 의지가 있었고 무술과 학업에 전념하고 병법가지 연구하였다. 1061년에 타잉화 응에안 지역에 있는 족장들이 조정을 어지럽게 혼란시키지 리 타이 통 왕은 리 트엉 끼엣에세 낑 펑스 직위를 내려 그는 얼마후 이지역의 평화와 질서를 확립하였다.
대월(베트남의 옛이름)사기전서에 따르면 "다섯번째해 1076년부터 아홉번째해 3월 에 중국 송나라가 광남 지역을 관리하는 꽉 뀌를 초토사로 찌에우 띠엣을 부장으로 선발하여 9명의 장군과 군사를 지엠 타잉과 쩐락과 함께 협력하여 베트남을 침공하라고 지시 한다
왕은 리트엉 시엣에게 맞서 싸우라 지시했고, 그는 느 응엣 강에서 적을 참패시켰는데 이때 송나라 군사1000명이 넘게 죽었다 곽뀍가 청수하면서 베트남의 광응웬이라는 주를 빼앗았고 신유 6년 에 송나라는 베트남 꽝으웬주를 돌려주었고 베트남도 웅 컴 리엠 세주에서 잡았던 포로들을 풀어주었다.
1076년 10월에 꽉 뀌는 송나라 왕의 어명을 받아 사령으로 전국 10만 여명과 군량미 운송병역 20만여명을 받아 베트남을 공격하였다. 저략은 베트남을 두 방향으로 공격해 가위처럼 포위하는 전략이었다. 송나라 보병은 랑선에서 탕롱으로 밀고 들어오고 해군은 바익당강 으로 들어왔다. 송나라 군대는 대윌/베트남의 군대를 인해전술로 장학하고 탕롱지역을 장악하려 하였다.
1076년 11월 말에 송나라 군대는 광 이엔 지역을 장악하였다. 1077년 1월 18일 곽뀌와 미에우 리가 이끄는 군대가 느 응엣 포구와 티꺼우에 주둔하고 다음을 모색하던사이...
베트남은 적의 막강함에 게릴라전으로 적의 보급로를 끊는데 주력하였고 각개전투로 매복하여 적을 공격함으로 군량미를 운송을 차단 . 바다에서는 베트남의 해군이 매복해 송나라 해군의 길목을 막아 적을 퇴각 시켰다.
군량미가 부족한 상황에서 앞되로 공격을 당한 송나라 군은 당황하였고 이기회를 놓치지 않은 리트엉 끼엣은 보병과 해군을 모두 이끌고 반격을 가했다.
대월사기전서에 따르면
군사들은 어느날 쯔엉장군의 사당에서 시를 읊는 소리를 들었다.
ㅇ위키백과 사진 발취 ㅇ
베트남 국토에는 베트남 왕이 있다.
그것은 천서에 써 있다.
어디를 감히 넘보는가?
곧 실패의 쓴 맛을 볼 것이다.
이시는 심리적인 면을 이용하여 적을 당황하게 만들었고 대월의 승리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이대가 " 하늘의 기회 , 탕의 이로움, 사람의 화합" 으로 대월에게 유리한 요소들이 모아지는 시기였다.
리트엉끼엣은 군사적 측면에서 승리와 동시에 외교적인 면도 주동적으로 송나라 장군에게 사진을 보내 군사들을 모두 베트남에서 철군하는 조건으로 전쟁을 빨리 끝내자는 제안을 하였고 뽀족한 수가 없었던 꽉귀는 이조건을 받아들여 왕의 동의도 기다리지 않고 바로 군대를 철군시켰다.
1077년 2월 곽뀌의 22천여명의 군사와 기마가 송나라에 철군 치열했던 두달여의 전쟁이 끝이났다. 송나라에 19만명의 사상자를 내고 베트남에서 전군 철수하였다.
승리한 후에 리왕조의 현명한 외교정책 덕분에 송나라는 대월이 송의 속국이 아니라 독립된 국가임을 인정하게 되었다.
리왕은 예전처럼 송나라의 왕이 수여한 "교지 군왕" 이 아니라. 독립돤 왕이 된 것이다. 이승리가 바로 베트남 역사에 길이 남는 승리중 하나이다.
1105년 향년 86세로 리트엉끼엣이 별세하자 '기엠 히에우 타위 비엣 꾸억 꽁'(나라에 큰 광로가 있는 사람) 이라는 추서가 내려졌고 베트남 여러곳에 그의 사당이 세워졌다.
하노이 벌전에 맞워 리트엉끼엣 거리는 점점 발전하고 현돼화 되어가고 있고 내가아는 멜리아( Melia hotel ) 호텔을 가로질러 고풍스러움을 간직하고 있다.
'베트남 역사 문화와 유적 > 베트남 빛낸 위인과 거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책거리" 하노이 이야기 (0) | 2017.07.08 |
---|---|
하이바쯩 ( Hai Bà Trưng ) 쯩자매 거리 (0) | 2016.04.26 |
레득터 ( 외교관 이름의 거리)/Lê Đức Thọ (0) | 2016.04.02 |
베트남 최고의 장군 쩐 흥 다오 장군/ Trần Hưng Đạo (0) | 2016.03.28 |
36거리 - 하노이에서의 방황 (0) | 2016.03.09 |